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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느 순간 자신을 한참 앞질러 버린 것들, 말이 되지 못할 것 같던 서로의 감각에 애써 집중하며 대화를 이어나가곤 했다. 공기 중에 어렵게 교환될 수 있었던 그 말과 생각들이, 형체를 가질 것 같다가도 훅 사라져버리기도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작업과 가까운 시간 속에서 내밀하게 포착해 나가려 해왔던 걸까. 박정인은 쓰고,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연필을 사용해왔다. 은연중에 체화되어온 친숙한 연필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흑연의 빛깔이 미묘하게 그림자의 빛깔과 겹쳐졌을 때, 복합적인 사고의 단면을 표현할 수 있을 명도만의 언어와 그림의 여지를 본다. 이번 전시에서 그간의 그림자 작업을 통해 연상된 흑연의 빛깔과 잔상들을 드로잉과 회화의 간극에서 정지된 상태에 가깝게 구현한 작업들을 선보인다. 양아영은 본 것의 색, 모양, 상황 중 한 가지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듯이 한쪽에 먼저 그린 후, 부분적으로 보거나, 안보기 시작하며 나머지 것들을 변형, 왜곡하여 이어붙이고 나열함으로써 재현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간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미 변화 과정을 거친 사물의 모습을 보고, 그것과 유사하거나 동떨어진 표현을 모아 그림으로써 경험이 단선적이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각자의 작업 안에서 간격을 경험하는 주체로서 우리를 간격이라는 이름으로 붙여보고, 간격이 생기기 위해 전제조건으로 있어야 하는 둘 이상의 주체가 우리 각자가 되었을 때, 한명의 필자와 관객은 간격의 어느 순간에 놓이게 될까. 본 이인전은 서로의 차이와 공통분모를 애써 완전한 하나의 문장으로 제시하려 하기보다는 간격이 발생하는 순간과 온전함, 그것을 이어나가려는 사고와 시선의 흐름에 ‘간격’을 제안하는 것에 가깝다.
/ Park Jung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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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플리니우스(AD 23-79)의 『박물지』 제35권에 수록된 「회화의 기원」에 등장하는 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고대 그리스 코린트에는 점토 공예가 부타데스가 살았습니다. 부타데스의 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전쟁에 징용되어 곧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탄에 빠진 부타데스의 딸은 어느 날 밤, 잠든 연인을 비춘 촛불이 그의 그림자를 벽에 드리운 모습을 보고는 난로에서 숯을 꺼내 들고 이를 따라 그렸습니다. 로마의 해군 지휘자 플리니우스, 총 37권의 라틴어 백과사전으로 당대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했던 바로 그 대학자는 절박한 마음으로 그림자를 본뜬 것이 곧 회화의 기원이라고 말합니다.
부타데스의 딸—자꾸 누구의 딸이라고 말하기 번거로우니 앞으로는 A라고 합시다—이 벽에 옮긴 연인의 상(像)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A가 그려낸 벽화는 연인을 대신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보고 싶은 사람의 사진을 보며 그리움을 달래듯 A도 숯으로 떠낸 그의 그림자를 보며 사무치는 마음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요?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면 무엇이 남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A의 연인을 닮은 형체라기보다 벽보다 명도가 낮은, 얼룩덜룩한 면적에 가까웠을 겁니다. 빛이 그를 어떻게 어루만졌는지 혹은 빛나갔는지를 알려주는 표면에는 무언가 얹어진 곳과 그렇지 않은 곳, 빛을 반사하는 곳과 빛을 집어삼키는 곳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가 떠난 후, 날이 밝아오면, 새로운 빛이 찾아옵니다. 오늘 아침의 그림자가 어젯밤의 그림자 위에 덧붙습니다. 큰 어둠 위에 작은 어둠이 겹쳐집니다. 혹여 A의 연인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전과 같을 수 없는 모습으로, 어쩌면 다리 한쪽을 잃거나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면요?
사랑하는 사람을 곧 잃을 것 같아서 그를 뚜렷이, 최대한 오래, 그 선명한 모습을 머리에 옮겨놓으려고 애쓴 적이 있나요?
…
갑작스레 이 순간, 이 모습, 이 표정은 앞으로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찬 적이 있나요?
…
ii.
B는 시도 때도 없이 “포토그래픽 메모리”라는 것을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원하는 장면을 마치 사진 찍듯 머릿속에 욱여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화를 보다가 “이 부분은 꼭 기억해두고 싶다”며 마치 카메라 셔터가 ‘찰칵’하듯 두 눈을 과잉된 동작으로 ‘깜빡’하곤 했습니다. 간혹 그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면 B는 꽤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무언가 기억을 하려면 여러 번 되뇌어야 하지. 열 가지 이름을 기억하려면 그것을 수차례 중얼거리며 입 밖으로 내뱉거나 손으로 종이가 까매질 때까지 직접 적어 넣어야만 하는 바보들이야. 그렇게 갖은 노력을 해도 결국에는 열 가지 중에 너덧 개 정도 출력해낼 수 있다면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 그것도 모자라 기억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열패감 같은 감정이나 은은하게 새겨질 뿐이라니까? 나는 그저 그 모든 정보가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의 사진을 찍으면 그걸로 충분한데 말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며 사라지는 B가 꽤 밉상이었지만 나는 그의 고집이 싫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내심 내 얼굴도 사진 찍듯 그의 머리에 각인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로 멀어졌고, 만나지 못한 지 수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좁은 골목길을 오르다가 그가 나를 스치며 내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그가 나를 못 알아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둘러 그를 붙잡고 추궁하자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너를 몰라. 적어도 이렇게 생긴 너 말이야. 지금의 너, 내 옆에 있을 때와 옷 입는 스타일도 다르고, 걷는 자세도 다르고, 눈을 뜨고 감는 속도도 다르고, 심지어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도 달라. 그런데도 내가 너를 너라고 단박에 알아볼 거라고 기대했어? 나는 너를 잊어버린 게 아니야. 그저 그때의 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저는 그보다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가 가진 포토그래픽 메모리라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토록 멸시하던 머리 나쁜 사람답게 그를 잊고 싶지 않아서 그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동안 나는 오히려 그를 조금씩 잊었습니다. 그가 매일 입고 나타나던 남색 점퍼에 줄무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가 가르마를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쪽으로 탔는지, 불편한 상황에서 눈과 코 중 어느 것을 찡끗하는 습관이 있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남기고 싶은 지 알지 못한 채 어쨌든 남기기로 한 바로 그것을 위해 나는 다른 무언가를 지우고 자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손톱 밑 돌출된 살을 지우고 테이블의 테두리를 지우고 카페라테의 거품을 지우고 짝짝이 바지의 끝단을 지우고 가방의 손잡이를 지우고 허리를 받친 쿠션의 솔기를 지우고 대신 손가락 마디의 도톰한 살점과 테이블 표면의 광택과 커피잔 받침에 비친 간접 조명의 온도와 낡은 가짜 가죽의 감촉과 오목하게 들어간 척추를 잡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언제나 그르고 그는 언제나 옳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괘념치 않기로 했습니다. 그는 이제 나의 반전된 세계에서 증식하고 생략되고 장막을 치고 걷고 반사하고 섭취하고 자리를 폈다 접으며 제자리걸음을 할 운명이니까요.
iii.
쓰다듬어서 불투명하게 만들거나
좀 더 마르게 스쳐서 산만하게 만들거나
조금 고이게 하여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힘을 주어 하강의 방향을 만들어 중력을 더 받은 것처럼 만들거나 평평하게 펼쳐 늘어뜨리거나
휘몰아치다가 갑자기 힘을 풀어버리는 일
이 모든 것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자가 아닌 것이 조금 다른 명도로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자 취급을 받는 애석하고 다행스러운 일까지도.
Time window, 그러니까 우리가 도모하는 일을 일으킬 수 있는 구간은 어느 시점에 닫히고 말 것입니다. 빠르게 펼치지 않으면 전부 뒤엉켜 고이고 말 테니 재빠르게 차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 Figure to Figure by Yu Ji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