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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는 판, 잉크, 압력 그리고 판에 맞닿아 잉크를 받아낼 평평한 지지체가 필요하다. 판화의 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에는 나무, 금속, 종이, 아크릴판, 천, 돌 등이 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평평하고 매끈해야 하는데, 판을 선택하면 기본적으로 판의 성질에 맞춰 판을 좀 더 매끈하게 다듬는다. 예를 들어 목판의 나뭇결이 너무 강하다 싶으면 사포나 불로 살짝 그을 러서 표면을 더 부드럽게 하거나, 동판 등에 스크래치가 있으면 스크래치를 없애는 용액인 브라소(brasso)를 발라 연마하기도 한다. 혹은 판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질감-목판의 결, 종이, 천이 가진 질감, 약간의 부주의로 금속, 아크릴판에 생기게 되는 스크레치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판이 준비되었으면, 만들고자 하는 이미지를 판에 직접 그리거나 계획된 이미지를 판에 전사한 뒤 이미지에 맞게 판에 새기거나 덧붙인다. 목판의 경우 나무를 깍아 낼 수 있는 조각도, 니들, 사포 등을 사용하여 판에 새기고, 동판의 경우에는 니들, 스크레퍼 등의 스크레치를 낼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여 판에 이미지를 새긴다. 때때로 동판에 화학작용을 이용하여 부식에 의한 방법으로 판을 제작하기도 한다. 석판의 경우 석판용 유성 크레용을 사용하여 드로잉 한 뒤 아라비아고무액을 발라 물과 기름의 반발 작용으로 판을 제작한다. 최근에는 포토폴리머 판이나, 감광액을 바른 판에 흑백 필름을 올리고 빛을 쬐어 물로 씻어내는 방식으로 판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렇게 제작된 판은 볼록판화, 오목판화, 평판화, 공판화 등의 판 법에 따라 다른 농도와 질감의 잉크를 묻혀 압력을 가해 찍어낸다. 오목판화는 잉크를 홈에 밀어 넣고 나머지 부분은 판에서 닦아내야 하므로 점성과 접착력이 약하고 비교적 큰 입자의 안료로 만든 잉크를 사용한다. 평판화는 물과 기름의 반발 작용을 이용하여 얇은 잉크 층으로 프린트하기 때문에 작은 입자의 안료와 접착력이 좋은 잉크를 사용한다. 볼록판화의 경우 오목판화와 평판화의 잉크의 중간 정도의 접착력을 가지게 된다. 이때 잉크의 농도와 점도가 적절하지 않으면 판에 얹은 잉크를 모두 닦아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한 농도와 점도는 판 법에 따라서 적절하게 맞춰 줘야 하며 유성 잉크의 특성상 계절의 온도에 따라서 다시 한번 점도와 접착력을 조절해 줘야 한다. 때때로 점도와 접착력이 적절하지 않을 때는 마그네슘카보네이트Magnesium Carbonate나 번트 플레이트 오일Burnt Plate Oil등의 보조제를 이용해서 점도나 접착력을 조절하기도 한다.
판에 적절한 질감과 농도의 잉크를 얹으면, 종이와 같이 잉크를 받아낼 지지체를 판에 올려 적절한 압력을 주어야 한다. 이때의 압력은 바렌 등을 사용한 손의 압력을 이용할 수도 있고, 판화용으로 나와 있는 프레스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판화용으로 나와 있는 프레스기도 판 법에 따라 적절한 압력이 가해질 수 있는 동판용/ 석판화용/ 목판화용으로 구별되어 제작되어 있다. 만약 판 법에 맞는 프레스기가 없을 경우 다른 판법의 프레스기의 압력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원하는 결과 이미지가 단색이 아닐 경우, 이미지에 필요한 색의 개수만큼의 판이 필요하다. 위 과정을 거쳐 원하는 색의 레이어에 해당하는 판을 찍어내고, 두 번째 판에 다시 같은 과정을 거친 후에 첫 번째 결과물과 정확한 핀트를 맞춰 찍어내야 한다. 핀트를 맞추는 방법은 각 판 법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판의 같은 위치에 종이를 올려놓아 찍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핀트를 표시한 위치에 판이나 종이가 조금이라도 엇나가게 되어 첫 번째 결과물과 두 번째 결과물의 핀트가 맞지 않으면, 다시 위 과정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첫 번째 이미지를 찍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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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인은 학부 때 판화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판화작업을 하진 않는다. 그는 종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상을, 여러 종류의 연필과 흑연 가루를 사용하여 표면에 떠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선명해지기보다 흐려지는 그림자를 보며, 그것에 거의 근접 한 명도 와 형태를 백색의 종이 위에서 조절해나간다. 이러한 실제 명도를 관찰하는 작업을 토대로, 빛의 광량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빈 종이 화면 속 공간과 실제 그림자 상을 잇고, 드로잉과 회화, 그림 속 화면과 물리적 공간의 중간지점을 모색한다. 작가는 빛에 의해 만들어진 현재의 이미지를 사진을 인화하듯 종이에 떠내고 그것이 다시 어딘가에 놓이거나 인쇄되는 상황들에 관심을 둔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어떠한 형태를 판에 전사하여 다른 매개체를 이용하여 다시 결과물을 내는 일련의 판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인쇄 매체인 판화는 더 쉽고 경제적인 인쇄 매체가 등장한 이후, 더 이상 이미지를 동일하게 찍어내는 역할에 집중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그동안 나무, 금속, 돌, 종이 등 다양한 판을 이용한 판화 방법이 개발되었고, 각 판 법마다 복잡한 공정과정을 통해 동일한 이미지 결과물 생산이 큰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판화의 마지막 결과물보다, 판화 매체가 발생하는 과정의 부분 부분에 다른 태도로 접근하는 작업들이 생겨났다. 그런 태도들은 판화 매체 특유의 시간성에 개입하거나, 판화의 공정, 재료 자체에 집중된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판화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걸 그리지 않고 찍어야 할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선이나 색 하나를 위해 무수히 많은 공정을 지나쳐 만들어 낸 하나의 레이어 ‘1도’ 이미지는 다음 이미지를 위한 밑바탕이 된다. 결과 이전의 수많은 공정들, 그 안의 재료들이 결과의 이미지보다 좀 더 중요해진 작업들과 판화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작업에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방법적 태도로 끌어들여 만들어진 작업들은, 이전의 판화 매체로 수렴되지 않는다. 판화가 발생하기 위한 기본조건의 안팎에서 느슨하게 판화와 닿았다가 멀어졌다가 판화의 작업과정을 통과하며 작가들이 만들어 내는 작업들은 어떤 모습일까. / 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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